나의 기록/이것은 소설입니다

무제 - 2

공부할 것이 많구나 2022. 7. 19. 02:09

조수석에 앉아 하 작가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런데 하 작가의 얼굴이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꽤나 잘생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하 작가가 어떻게 생겼더라. 가물가물하다. 언젠가 내가 좋아했던 후배가 내 곁을 스쳐지나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후배에게는 좋은 향수 냄새가 났다. 좋은 향기이지만 어떤 향기인지는 묘사하기 힘들다. 다만, 그 향기를 다시 맡으면 , 이 향기였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향기를 나는 맡았다. 후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를 지나쳐 갔고, 나는 그 아이의 걸음 걸음 옅어지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후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작가의 얼굴도 그렇다. 꼭 그 향기 같다. 잘 생긴... 잘 생긴 얼굴... 머리에 문득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면, 모든 잘생긴 사람은 서로 닮고 모든 잘생기지 않은 사람은 제각각으로 생기지 않았을까? 잘생긴 남자 연예인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는 하작가와 닮은 부분이 있나 요목조목 따져본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상상에 잠겨 있던 중 재영이가 말한다.

나는 하 작가님 책을 읽으면서 울었던 적이 있어.”
『육각인간』 말하는 거야?”
. 주인공이 너무 가여웠거든.”
그렇지. 제대로 된 보호자가 없는 삶이었지.”
재영이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래도 결국 주인공은 예전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잖아. 나는 그래서 하작가님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일할 때도 굉장히 따뜻하고 인간적이셨잖아.”
“...”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작가님이 자살을 했다는 게.”

그럴 만하다. 하 작가는 잘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웃어주는 얼굴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눈부신 웃음이었겠지. 안 그래도 잘 생긴 사람이 성공까지 해서 보여주는 웃음이란 햇살 아래 유리조각처럼 나뭇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반짝였을 것이다. 그는 혹시 내 기억에 남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지금처럼아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준수한 외모에 잘 웃곤 했지.’ 이 정도로만 기억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끝을 일찍이 알고 있지는 않았을지. 그래서 자신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살아가던 것은 아니었을지. 나는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많이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이란 제멋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나를 생각하고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이 없어 보여도 나는 깔끔한 관계가 좋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재영이 역시 많은 생각에 잠긴 모양이다.

재영이는 사람을 잘 믿는다. 그것이 내가 재영이를 아끼는 이유이다.날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날 믿어주는 사람 앞에서 나는 더 솔직해질 수가 있는 법이니 나는 재영이에게는 내 마음을 많이 보여줄 수 있다. 재영이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재영이가 얼마나 슬플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재영이와 나는 언뜻 보면 무척 다르다. 한 명은 햇살 같고, 한 명은 얼음 같이 보일거다. 친해진 것도 햇살 같은 재영이가 그런 재영이를 귀찮아 하는 내게 계속 다가와서 그런 것이다. 계속 보고 있자니 재영이의 순진하고 귀여운 면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대학교 시절 동안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같은 회사에 입사했을 때 회사 사람들은 우릴 보고 말했다. 이렇게 다른 둘이 어떻게 친해졌느냐고. 사람들 눈에는 내가 참 차갑고 나쁜 사람인가보다. 사실 학창 시절의 재영이는 참 따뜻하고 좋은 녀석이었지만, 사회로 나온 재영이는 그래도 계산적인 면이 생겼다. 하지만 이전의 그 곰살맞은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는 덕에 뭐랄까, 예전에는 순수했지만 이제는 여우 같아졌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래도 재영이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니 하 작가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는 것 같다.

하작가의 죽음은 나에게도 좀 가벼이 넘기기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나는 그와 일을 했었고,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누군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처음이며, 그는 재영이 말 대로 꽤나 따뜻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속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누구나 남들에게 하지 못하고 꼭꼭 접어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 아닌가. 하 작가 주변에 재영이 같은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면 조금이나마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내 나의 짐작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어떤 것이 그의 삶에 있었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흔히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예술가나 글쟁이의 어떤 정신적인 복잡함, 병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쟁이들과 일을 하는 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괴팍함은 사실 다 허영에 불과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머리도 충분히 복잡하고 예술적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천재의 이미지는 낭만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오랫동안 작가들은 정치와 종교의 시녀 역할을 해왔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이전에 부자들과 귀족들은 많은 책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시적 소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떠오르기 시작한 부자들은 그런 의무 따위는 알지 못했다. 이제 예술가들은 사회로부터 소외 당한 것이다. 가진 기술은 글 쓰거나 그림 그리는 것인 이 예술가들은 이제 갈 곳이 없었다. 방 안에서 작업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으로 천재를 내세운다. 재능과 영감이라는 짐을 지고 광적이고 불우한 삶을 살아가는 천재. 귀족의 품에서 버려진 예술가들은 천재의 몸에 자신을 전신하여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챙겼던 것이다. 지금에와서는 예술 한다는 사람들은 그런 허울 뿐인 천재성에 자신의 불안정하고 괴팍한 정서를 묻어버리곤 한다. , 그렇게나름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정신이 일반 대중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병적이고 미치광이 같고 자살에 이르는 것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만약 미치광이의 작품이 인상 깊었다면 그건 특이해서이다. 그가 뛰어난 예술가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자신의 불안정함을 과시하는 그런 예술가들을 싫어한다. 폭력적이거나 과한 설정을 잡은 작품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하찮게 생각한다. 괜히 달라 보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고, 예술적으로 보이고 싶으니 그러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런 조잡한 것 없이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가 자살은 한 것은 그의 민감한 예술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타고난 짐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것이 다 마음 속에 있는 법이다. 살면서 그걸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나보다.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참 안타깝다.

'나의 기록 > 이것은 소설입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제 - 3  (0) 2022.07.19
무제 - 1  (0) 2021.01.26